안녕, 그리운 당신!

이번 달을 기점으로 내가 네덜란드에 온 지도 딱 5년이 되었더라. 그래서 이번 여름에 드디어 네덜란드어 공부를 시작했어! 5년이나 살면서 이제야 시작했다는 게 좀 우습지? 나도 전에는 어떤 나라에서 몇 년씩 살면서 그 나라 말을 못 하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어. 오래전에 독일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했는데 그때는 1년 만에 말도 조금 하고, 어린이 동화책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되었거든. 그래서 네덜란드에서도 자연스럽게 말을 배울 줄 알았는데 웬걸. 네덜란드어로 커피 한 잔도 주문할 줄 모르는 채로 5년이나 용케 잘 지내왔지 뭐야. 한국에서 오래 살았어도 한국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지. ‘살면서 필요를 못 느꼈다.’라는 게 정말 맞는 말이더라. 

네덜란드 사람들은 원체 길가에 뛰어노는 어린아이들도 기본적인 영어는 할 줄 알고, 본인들이 외국어에 유창하다는 사실에 자부심도 있는 편이라 어디를 가도 영어가 안 통한 적이 없었어. 떠듬떠듬 네덜란드어로 말을 시작하면, 상대방이 싱긋 웃으며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답하는 게 일반적인 곳이거든.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독일에서 지냈던 곳은 정말 작은 시골 마을이어서도 그렇지만 동네 사람들은 물론 교수님들과 학생들도 영어 대화를 부담스러워했었는데 말이야. 바로 옆 나라인데도 엄청난 차이지? 불편함이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니 동기가 생기지 않았고, 거기다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언어 공부를 자연스럽게 미루게 되었어. 그러다 지난달에야 잊고 살았던 엄청난 기폭제를 떠올렸지. 5년을 맞아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는데, 신청하려면 네덜란드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시험 보려는 사람이 많아 신청도 아무 때나 할 수 없는 데다가 결과가 한참 뒤에 나오기도 해서 부랴부랴 일단 다섯 과목 중 두 과목의 시험부터 신청했어. 그렇게 시험을 한 달 앞두고 책의 첫 장을 펴고 보니 정말 기본의 기본도 모르는 거야. 영어로 치면 he/she/it에 해당하는 hij/zij/het 같은 말도 모르겠더라고. 근데 또 재밌는 건 눈에 익숙했던 단어들은 오히려 몇 개 보이더라. 정부 보조금(toeslag), 세무서(belastingdienst), 보험(verzekering) 같은 말들이.😂 성인 이민자의 현지 정착을 돕는 목적으로 만든 시험이다 보니 학부모로서 겪을 일, 회사나 시청 업무, 병원이나 경찰서에서 할 일 같은 것들을 위주로 문제가 나오거든. 

어른 이민자로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건 이런 걸까? 버스에서 토끼 인형을 자랑하던 꼬마 아이에게 ‘토끼 좋아하니?’는 토끼를 뭐라고 하는지 몰라 못 물어도 세무서에서 보내준 보조금 관련 안내 편지는 대충 이해하는 그런 것? 어렸을 때 이런저런 언어를 공부했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시작점도 공부 방향도 전혀 다른 이 경험이 생경하면서 왠지 웃음이 나더라. 단어 하나를 외우려 읽고 쓰고를 반복해도 다음 날 아침에 눈 뜨면 씻은 듯이 기억나지 않는 것도 내 머릿속 세월의 흔적을 느끼는 어떤 방법이라며 웃어넘기고 있어.

남자 친구에게 ‘나는 두 살배기도 다 아는 토끼, 사탕, 하늘 같은 말도 몰라.’라고 하니 ‘모른다고 생각한 이 기회에 새로 배우면 되면 되는 거지.’라고 하더라고. 너무 당연한데 또 너무 맞는 말이라 새삼 뭔가를 모른다는 게 별일 아니게 느껴지더라. 처음에는 모르는 것만 보여서 어느 세월에 시험을 다 통과하고 유창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걱정만 쌓였는데, 새로 알게 된 것들, 새로 겪는 일들이 늘어나니 공부도 조금씩 더 재미를 붙이고 있어. 뭔가를 새로 배우기 시작할 때는 성과가 바로 보이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고. 바쁜 삶에 익숙한 현대인이라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이 또 금세 들지만 말이야. 

당신이 새로 무언가를 배우거나 적응해야 하는데 발걸음이 더뎌 답답할 때, 어딘가에서 강아지, 고양이, 연필, 지우개 같은 단어를 외우느라 한숨 쉬고 있을 나를 떠올리며 웃어넘길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