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독백

나에게는 720MB짜리 옷장이 있다. 가로 23,000, 세로 8,000픽셀짜리 이 디지털 옷장에는 내 옷들의 이미지가 종류별, 계절별로 분류되어 있다. 경제력을 갖춘 이후 나만의 입는 철학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옷장은 시작됐다.

디지털 옷장의 효능(?)은 당연히 옷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옷장을 열면 나에게 어떤 색과 어떤 종류의 옷들이 얼마나 있는지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다. 처음 옷장을 만든 후 새삼 옷이 많다는 걸 체감해 버려서, ‘입을 옷이 없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새로운 아이템 영입을 고민할 때는 일종의 거름망이 되는데, 이미 있거나 대체할 수 있는 옷이 옷장에 있다면 그 영입은 반려당한다.

이렇게 옷들을 펼쳐놓으면 마치 인형 놀이처럼 데일리룩을 만들어볼 수 있다. 하나하나 꺼내 입어보지 않고 화면 앞에서 옷 조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새롭고 다양한 코디를 만들 수 있다. 최근에는 이런 데일리룩을 기록하게 되었는데, 의식적으로 중복되지 않고 고루고루 옷을 챙겨입게 된다.

이런 기록은 결국 내가 좋아하는 옷이 무엇인지, 상세한 취향을 보여준다. 목이 드러나는 라운드 넥보다는 셔츠나 목티처럼 적당히 가려주는 것을 좋아한다. 불균형한 크로스백이나 손에 들어야 하는 토트백보다는 손이 자유로운 백팩을 선호한다. 벨트를 매는 것보다 사이드 어드저스터가 있는 바지에 손이 더 잘 가는 편이고, 신발은 일단 무조건, 무조건 편해야 한다. 그렇게 입는 취향이 계속 써 내려져 간다.

앞으로 이 옷장은 레이어가 추가되기도, 삭제되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 나갈지 지켜보는 것도 나를 탐색하는 과정일테다.

2024.06.19 (수)

내일은 어떻게 입을지 기분 좋은 고민을 하며, 효그 보냄

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