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일 년에 몇 권 읽었는지 확인을 안 한다. 한 책을 한 번에 다 읽기보다, 여러 권을 병렬 독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각각 다른 파편들이 뒤섞여 머릿속으로 들어와 연결되는 재미는 독서 리스트를 무한정 늘어나게 한다.

조르주 페렉의 <인생 사용법>은  문학작품들을 참조하거나 차용하기만 해서 쓰인 소설이라고 한다.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그것들이 모여 아주 새로운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가 사서로 일한 경력이 영향을 미쳤을 거란 이야기는 지식 탐닉 욕구를 자극한다.
 
나 또한 많은 부분이 차용으로 이뤄졌다. 마음에 드는 단어를 들으면 곧잘 따라 사용한다. 잘 입는 옷들은 누군가 큐레이션 한 편집숍의 제품들이다. 내가 하는 디자인도 각기 다른 작업의 요소를 참고해 재조합한 작업이다. 지금의 성격은 가족, 친구, 그리고 스쳐 간 수많은 관계에서 오려 붙인 것일 테다. 그렇게 훔쳐낸 조각들이 모여 콜라주가 만들어진다.

기억 또한 중요한 부분만 도려내 재정렬된다. 마치 유튜브처럼 순서 없이 원하는 곳을 돌려 재생한다. 기억 속에서는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살아간다. 그렇게 편집된 시간만이 나를 설명해 준다.

결국은 내 안에 무엇을 빌려오고, 무엇을 남겨둘지의 이야기이다. 오롯이 나다운 정체성이라는 건 희미해진다. 내 안으로 들어오고, 뒤섞은 것들의 총합일 따름이다. 그렇게 매번 새로운 내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무엇을 가져오고, 없애며, 어떻게 연결하는지가 나를 결정한다. 지금의 나는 가장 익숙한 것들을 조합일 뿐이다.

<시대 복장>전시에서 패션 브랜드 혜인서의 작업 프로세스를 볼 수 있었다. 책과 이미지, 텍스트가 엮여 옷으로 나오는 과정이 신비로웠다. 옷 하나의 선과 패턴에도 수많은 영감이 참조되어 있었다. 나도 결국 이런 참조가 엮여서 나오는 컬렉션 같은 것일 테다. 나라는 보드를 펼치고, 앞으로 어떤 걸 붙이고 선을 그을지 상상해 본다. 채우고, 비우고, 바꿔나갈 조각들을.